검정, 戰 _ 구모경
여백의 공간과 의도치 않은 먹의 번짐은 선의 맹렬한 기세를 감싸 안아 작품을 완성한다. 의도적인 선과 비의도적인 번짐, 이 둘이 만나 화면에 기운(氣韻)을 불어넣는다. 기와 운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 필획의 기는 여백이 있어야 두드러지며, 강한 필선 뒤에 여운이 남는다. 그리고 이 여운이 풍부한 감각적 경험을 선사할 때, 운치를 느낀다. 이미 지나간 감각, 지나간 형상이 남기고 간 운치다. 한바탕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공허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빈 공간을 채우는 가는 떨림이다. 여백은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공허한 공백이 아닌, 여유에서 오는 적극적인 비움이다. 능동적인 비움을 통해 완성해 도달한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 자연과 닮은 공간을 작품에서 구현한다.
현대 화가들에게 운(韻)의 실현은 물성에 집중함으로써 실험되어 왔다. 이들은 종이와 먹의 조화와 번짐을 통해 수묵화의 질료 그 자체에 주목하였다. 종이와 먹이 어우러져 나타는 ‘번짐’이 이와 같은 시도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여 은은하게 물들고자 하는 우리의 사고 방식과 닿아있다.
최진하 | 뮤지엄 산 큐레이터